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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을 4년 더 할 수 있는 확률을 조금이라도 더 높여보겠다는 조바심

오리지널마인드 2018. 4. 4. 08:01

문재인 대통령이 현행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바꾸는 개헌안을 내놨다. 여론조사마다 4년 중임제가 바람직하다는 응답이 50% 내외로 가장 높고, 5년 단임제는 그 절반 정도, 내각제와 이원집정부제는 각각 10%를 밑돈다. 5년 단임제는 이미 수명을 다했고 내각제와 이원집정부제는 국회 힘이 더 세진다니까 국민이 질색한다. 그래서 4년 중임제 쪽으로 여론이 모이는 분위기다.

중임제가 단임제보다 좋은 점은 능력이 검증된 대통령에게 4년 더 기회를 줘서 국가적 장기 과제를 완수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일 것이다. 1987년 개헌 때 중임제를 도입했으면 누가 그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

역대 대통령의 임기 4년 말 국정 지지율 평균을 내보니 노태우 15%, 김영삼 28%, 김대중 31%, 노무현 12%, 이명박 32%, 박근혜 12%였다. 4년 중임제인 미국에서 재선에 나설 수 있는 국정 지지율 하한선을 40% 정도로 보는데 아무도 그 기준을 맞추지 못했다.

우리 국민은 바꾸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편이다. 국가별 스마트폰 평균 사용 기간은 한국이 15.6개월로 조사 대상 33개국 중에서 가장 짧았다. 미국은 18.2개월, 일본은 29.2개월이었다. 국회의원 물갈이 비율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4년 겪은 대통령과 4년 더 지내겠다는 국민이 절반을 넘어야 대통령 중임제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을 듯싶다.

중임제의 부작용은 뭘까. 미국 정치사의 가장 어두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워터게이트 스캔들에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1972년 6월 전직 CIA 요원들이 낀 괴한들이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해서 도청장치를 설치하다가 발각됐다. 닉슨 대통령의 재선 준비팀이 상대 당 선거 전략을 알아내려다 벌어진 일이다. 그해 11월 치러진 대선에서 닉슨은 선거인단 520명을 확보해 17명에 그친 민주당 조지 맥거번 후보를 압도했다. 남의 선거 본부를 훔쳐보는 치졸한 공작 따위는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대통령을 4년 더 할 수 있는 확률을 조금이라도 더 높여보겠다는 조바심이 자기 무덤을 파고 만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4년 중임제로 바뀔 경우 마찬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현역 대통령들은 재선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권력을 동원하겠다는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 것이다. 차기(次期) 대선 후보들을 흠집 내거나 제거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대통령이 부패한 정치 풍토를 적폐로 규정하고 사정(司正) 기관이 청산에 나서는 모양새를 취하면 문제 삼기도 어렵다.

개헌 방향이 중임제 쪽으로 기울어 가는 것이 불길하게 느껴진 것은 현 정권을 향한 검찰과 경찰의 충성 경쟁이 거의 광기(狂氣)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역대 정권들도 나라 풍토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을 앞세워 정치보복을 해왔지만 겉모습만큼은 그럴듯하게 꾸미는 시늉을 했다. 범죄혐의를 좇다보니 전(前) 정권 관계자 연루사실이 드러나 어쩔 수 없이 처벌한다는 식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달랐다. 처음 댓글 지시 혐의를 캐다 여의치 않자 국정원 특수 활동비로 방향을 틀었고, 오래전 검찰·특검 수사까지 거쳤던 다스 실소유자 논란도 다시 털었다. 10년 전 대선 자금에 뇌물 혐의를 적용해 200장이 넘는 영장을 청구했다. 범죄 혐의를 따라가며 관련자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인을 대상으로 먼저 정해놓고 가능한 혐의를 모두 뒤지는 방식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MB를 향해 "분노한다"고 공개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찰도 질세라 자유한국당의 지방선거 후보들이 결정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맞춤형 수사에 착수하고 있다.

중임제가 되면 권력과 검경은 운명 공동체로 더 단단하게 엮일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 검경 핵심세력의 수명도 함께 4년에서 8년으로 연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재선 경쟁자를 확실하게 손보는 공적을 세우면 2기 행정부에서 '보은 인사'라는 보너스도 따라올 것이다.

5년 단임제에서 대통령 취임 전 구원(舊怨)을 쌓은 상대를 겨냥한 정치 보복이 이뤄져 왔다면 중임제에선 대통령 정치 수명 연장을 위협할 잠재적 경쟁자가 사정(司正) 표적이 될 것이다. 둘 다 추악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과거 정치인 대신 미래 정치인이 희생되는 것이 국가적 해악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 중임제로 개헌한다면 대통령이 권력기관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동원할 수 없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를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임제의 폐해가 중임제에서 곱절로 증폭돼 나타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