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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가지즘(dgagisme)'이다. '구시대의 정치권과 인물을 청산하자

오리지널마인드 2017. 5. 3. 10:53
올해 프랑스 대선 정국에서 낯선 용어가 하나 등장했다. '데가지즘(dgagisme)'이다. '구시대의 정치권과 인물을 청산하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우리도 이데올로기와 사상이 소용돌이친 격동의 현대사를 겪었지만, 이 새로운 주의(主義)는 도무지 낯설기만 하다. 프랑스도 탈당과 분당, 당명 교체 등 이합집산이 빈번해서 정치 지형이 복잡한 편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정치 상황이 아니라 어원을 통해서 접근하면 의외로 쉽게 실마리가 풀릴 수도 있다.

영어든 불어든 'gage'는 담보라는 의미다. 담보를 잡히는 행위를 뜻하는 영어 동사가 '인게이지(engage)'다. 이 동사의 명사형이 '인게이지먼트(engagement)'다. 불어로는 '앙가주망'으로 읽는다.

영어나 불어에서 이 단어의 쓰임새는 넓다. '약혼'이라고도 번역하지만 실은 '구속'이나 '참여'라는 뜻이다. 상대가 사랑하는 연인이 됐든, 현실이 됐든 그 속으로 뛰어들 때만 약혼도 할 수 있고 참여도 가능하다는 의미다. 프랑스 사상가 사르트르가 지식인의 실천을 강조할 때 사용했던 그 말이다. 어떤 일이든 뛰어들면 구속이나 의무가 따르게 마련이다. 지식인의 사회 참여와 약혼이 같은 단어가 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4월23일(현지시각) 프랑스 대선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해 5월7일 치러지는 결선 투표에 진출한 중도 신생 정당 '앙마르슈(전진)'의 에마뉘엘 마크롱(왼쪽) 후보가 파리에 있는 자신의 선거본부에서 24세 연상의 아내 브리지트와 함께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AP 연합뉴스
그 반대말에 해당하는 동사(動詞)가 '데가제(dgager)'다. 이 단어에는 벗어나고 탈출한다는 뜻이 숨어 있다. 이 동사의 명사형이 '데가주망(dgagement)'이고, 정치사상이나 철학의 차원으로 한 차원 격상시킨 신조어가 '데가지즘'이다. '데가지즘'은 당초 2011년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 시위 당시 독재자의 퇴진을 요구하며 외쳤던 구호에서 유래했다. '반짝 유행어'에 그칠 줄 알았더니 올해 프랑스 대선 정국에서는 공산주의와 실존주의를 이을 정치사상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결선에 진출할 프랑스 대선 후보 2명을 가리는 지난달 1차 투표에서도 기존의 좌우파 정당 후보들이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 결국 올해 프랑스 대선은 창당 1년밖에 되지 않은 중도 신생 정당인 '전진(En Marche)!'의 에마뉘엘 마크롱(40)과 극우 정당인 국민전선(FN)의 마린 르펜(49) 후보의 맞대결 구도가 됐다. 오는 7일 실시되는 2차 투표에서는 마크롱의 당선이 유력하다. 하지만 기성 정치권에 대한 강한 불신이 담긴 '데가지즘'은 올 프랑스 대선 국면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됐다. '앙가주망'을 평생 화두로 삼았던 사르트르가 이 소식을 듣는다면 무덤에서 통탄할지도 모르겠다.

'데가지즘'의 부상은 계층과 이념, 지역이라는 든든한 지지 기반을 갖춘 뒤 집권을 놓고 격돌하는 근대식 선거 체제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부단하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민심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정당 역시 언제든 냉소와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얼마나 다른 걸까.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