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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이 불확실한 직원과 검증되지 않은 숙박 환경. 여기에 무제한 술까지 더해졌으니 사고가 없는 게 이상할 정도

오리지널마인드 2018. 3. 8. 08:34
'베티블루 37.2.'

1986년 개봉한 이 영화를 찾아보게 된 건 최근 범인의 자살로 끝난 제주 게스트하우스 살인 사건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살인범 한정민(33)이 가장 좋아했던 영화는 베티블루 37.2였다. 블로그 아이디도 'jeju372', 키우던 개 이름도 베티였다.

게스트하우스 메인 페이지에도 '설렘의 체온 37.2'라고 적혀 있다. 영화 속에서 섭씨 37.2도의 의미는 임신이 가장 잘되는 온도다. 남자 주인공 조그는 사랑하는 여주인공 베티를 목 졸라 살해하며 영화는 끝난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했을지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한씨는 전과자였다. 과거 주유소에서 일하다 돈을 훔친 이력이 있다. 작년 7월에는 술에 취해 의식이 없던 투숙객을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는데 전혀 제한이 없었다. 성범죄로 이미 실형을 받았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현행법에서 성범죄 전과자가 취업할 수 없는 곳에 숙박업은 포함돼 있지 않다.

한씨는 관리인으로 나오지만 사실상 공동 대표였다. 주인은 한씨에게 전적으로 경영을 맡기고 수익금을 나눠주고 있었다. 제주도 게스트하우스는 대부분 농어촌 민박으로 등록한다. 별다른 요건 없이 신고만 하면 된다. 살인마가 민박을 차려도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구조에서 한씨가 운영한 '파티 게하(게스트하우스 준말)'는 그야말로 '성범죄의 화약고'였다. 도민들 사이에서 "내일 또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파티 게하'는 기존 숙박료 외 1만5000~2만원의 파티비를 내면 무제한으로 맥주를 마시며 파티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일부 게하들은 전문 DJ를 부르고, 남녀 성비도 맞춘다. 이들은 "100% 썸탈 수 있는 곳"이라며 홍보한다.

제주도에서 '파티 게하'는 2014년쯤부터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2012년 올레길 살인사건으로 게스트하우스들이 침체기에 빠지자 나온 아이디어였다. 신분이 불확실한 직원과 검증되지 않은 숙박 환경. 여기에 무제한 술까지 더해졌으니 사고가 없는 게 이상할 정도다.

실제로 업계에서는 "여성과의 잠자리를 목적으로 취직하는 스태프들이 많았다"는 증언도 나온다. 술에 취해 여성 방에 강제로 들어가도 방에 잠금장치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고객이 경찰을 부르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한다.

이번 사건으로 혼자 여행을 가는 여성들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이런 환경이라면 둘 셋이 가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이번을 계기로 제주도는 물론 전국에 퍼지고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대한 대대적인 점검과 관련법 개정이 필요하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