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오동 금귀고리
좋은글1933년 경주읍 노서리 215번지에 살던 김덕언은 자기집 토담을 따라 호박씨를 뿌리려고 땅을 갈다가 금제품들을 수습했다. 금귀고리 1점, 은팔찌 1쌍, 금·은반지 각 1점씩, 금구슬 33알이었다. 유물을 본 일본학자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쌍이어야 할 귀고리가 왜 1점뿐일까.’ 본격 발굴 끝에 나머지 금귀고리 1쌍과 금구슬 44개 등 한 세트를 이루는 유물을 찾아냈다. 문제가 생겼다. 1934년 김덕언이 수습한 반쪽은 서울(조선총독부 박물관)로, 아리미쓰가 찾아낸 반쪽은 도쿄제실박물관으로 각각 이송됐다. 노서리 유물의 반쪽은 한일협정에 따라 1966년 5월 반환된다. 문화재위원회는 1967년 팔찌(454호), 귀고리(455호), 목걸이(456호) 등을 보물로 지정한다. 32년의 이산소동은 해피엔딩으로 끝난 것 같았다. 2000년 어느날 이한상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현 대전대 교수)에게 일본학자 후지이 가즈오(藤井和夫)가 문제를 제기했다. “1998년 발표한 이한상 학예사의 논문에 언급된 보물 455호는 ‘노서리 금귀고리’가 아니”라는 지적이었다. 이 학예사는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보물 목록에 올라 있는 유물은 대체 무엇인가. 아마도 1967년 황오동 금귀고리를 노서리 것으로 착각해서 보물로 지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마침내 2009년 문화재위원회가 보물둔갑사건을 다뤘다. 그러나 노서리 귀고리의 명예회복은 물거품이 됐다. 지정목록만 ‘노서리’였을 뿐 지금까지 모든 전시품이나 도록에 ‘황오동 것’이 수록됐다는 이유였다. 황오동 유물이 더 정교하다는 점도 감안됐다. 출토 때부터 반으로 나뉘었고, 서울과 도쿄로 흩어졌다가 천신만고 끝에 해후했는데, 이제는 더 잘생기고 예쁜 배우자를 만났다고 소박당한 꼴이다. 보물 지위를 잃어버린 노서리 금귀고리는 처량한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1966년 반환 이후 단 한 번도 수장고 밖을 나오지 못하고 있다. 유물 사진 역시 흑백(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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