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바다

미국의 풍요와 번영 뒤에 노예 제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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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프레드 윌슨(Fred Wilson·63)은 미국 메릴랜드 역사회 박물관의 초청을 받아 특별전시 '박물관 채굴하기'를 선보였다. 그러나 윌슨이 미술가로서 새롭게 창작한 작품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단지 1844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박물관의 수장고를 '채굴'하듯 뒤져서, 공개되지 않았던 소장품들을 전시장으로 옮겨 진열했을 뿐이다.

프레드 윌슨, 박물관 채굴하기, 1992년, 미국 메릴랜드 역사회 박물관의 전시 중에서.

'금속 제품 1793~1880'이라는 명패가 붙은 이 진열장에는 글자 그대로 1793년에서 1880년 사이에 제작된 은제 식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처럼 자못 호화롭고 정교한 공예품의 존재는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갓 독립한 신생국 미국에도 유럽과 견줄 만한 예술적 역량과 세련된 소비 계층이 있었다는 걸 증명한다. 그런데 윌슨은 이 진열장 한가운데에 시커먼 쇳덩어리나 다름없는 족쇄를 추가했다. 틀린 건 전혀 없다. 이 족쇄도 명백히 1793년에서 1880년 사이에 미국에서 만들어진 금속 제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족쇄가 등장하는 순간, 이 진열장은 이전과 전혀 다른 역사를 증명하게 된다. 즉, 미국의 풍요와 번영 뒤에 노예 제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윌슨은 이처럼 단순한 개입만으로도 박물관이 자랑하는 미국의 위대한 성취, 그 이면에 억눌려 있던 인종차별이라는 '흑역사'를 강렬하게 보여주었다.

윌슨은 한 인터뷰에서 "보여주는 것들이 그 박물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지만, 보여주지 않는 것들이 사실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면서, "틀림없이 존재하는데도 평균적인 관람객의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을 찾아내고 싶다고 했다. 보여주는 것만 보는 '평균적인 관람객' 신세를 면하는 방법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절실히 궁금해진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