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바다

축구든 인생이든 운동장은 넓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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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의 麗水漫漫] 여수 앞바다에는 섬만 수백 개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나름 화가


제발 우중충한 '개량 한복'은 안 입고 나왔으면 좋겠다. 꼭 회색 아니면 진한 고동색이다. 요즘 환한 색의 예쁜 개량 한복도 참 많다. 흰머리가 가득한 '꽁지머리'는 정말 '으악'이다. 아내는 화면으로 보고만 있어도 '쉰내'가 난다며 채널을 돌리라고 야단이다. '야전 상의'에 '건빵 바지'도 빠지지 않는다. '야전상의'의 목덜미는 묵은 때로 반질반질하게 굳어 있을 게 분명하다. 수년간 면도를 건너뛴 얼굴은 구구절절 꼬질꼬질하다. 그런데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자연인'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모 방송 프로그램의 주인공들 이야기다. 리모컨을 돌리다 보면 꼭 걸려든다. 내용이야 수년째 한결같다. 모든 주인공이 산에 약초 캐러 올라간다. 이 풀은 어디에 좋고, 저 열매는 어디에 좋다는 근거 불분명한 이야기만 한참 늘어놓는다. 죄다 한의사다. 산에서 내려오면 텃밭에서 상추나 파를 따서 저녁을 한다. 불을 피워서 대충 요리하는 모습은 세상의 모든 여자가 질색할 수준이다. 아주 더럽다. 안 보여주는 게 더 나을 법한, 아주 대충 하는 설거지가 끝나면 불 앞에서 이전에 고생한 넋두리가 이어진다. 그 이야기 또한 거기서 거기다.

이 '저렴한' 프로를 나만 보는가 해서 물어보니, 내 또래 인간들은 죄다 '자연인' 마니아다. 기사를 찾아보니 지상파와 종편을 통틀어 '한국인이 좋아하는 프로그램 톱 텐'에 매년 꼭 들어간단다. 그 수많은 프로그램 중에 이 '장마철 걸레처럼 쉰내 나는 방송'이 한국 사내들에게 이토록 인기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자유'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종류의 '자유'인가? 우선, 마음껏 '불 피울 수 있는 자유'다. '불 피우기'는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인류 역사에서 모든 '의미'는 '불 피우기'와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모든 종교적 리추얼에 '불 피우기'가 빠지지 않는 거다. 한국 사내들의 느닷없는 캠핑 열풍도 이 '불 피우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서다. 삶의 의미가 찾아지지 않으니 자꾸 이상한 '불장난'만 하는 거다.

더 중요한 자유가 있다. '시선의 자유'다. 이건 한국 사내들에게 매우 절박한 자유다. 평생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기 때문이다.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하는 것처럼 치명적인 것은 없다. 지켜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누군가 지켜본다고 생각하며 평생 두려워하며 살고 있다.

학창시절 시험감독 선생님은 항상 교실 뒤쪽에 있었다. 학생들은 선생님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다고 생각하고 커닝 따위는 엄두도 못 냈다. 시험지를 교탁에 올려놓고 돌아보면 감독 선생님은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참 허망했다. 그러나 한국 사내들이 근무하는 사무실에서 감시의 시선은 항상 작동한다. 과장이나 팀장의 위치는 부하 직원들을 한눈에 감시하는 위치에 있다. 몸도 마음도 꼼짝 못 한다.

선글라스가 멋있어 보이는 이유는 시선의 방향을 감지 못하기 때문이다. '감시의 공포'가 '경외'로 둔갑하는 것이다. 물론 내 친구 문창기처럼 가릴수록 멋있는 경우도 있다. 아주 고급스러운 커피 사업을 무지하게 크게 하지만, 진짜 '컨추리'하게 생긴 창기는 선글라스를 쓰면 참 멋있다. 거기에 황사마스크 하고, 모자까지 눌러 쓰면 진짜 폼 난다. 창기는 강남의 그 비싼 회사건물 옥상에서 배추 농사를 짓는다.

'관찰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맘대로 '볼 수 있는 자유'가 행복의 핵심이다. '나는 자연인이다'에 넋 놓게 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누리는 '시선의 자유' 때문이다. '시선'과 관련해 영국의 지리학자 제이 애플턴(Jay Appleton)은 '조망-피신(prospect-refuge)'이론을 주장한다. '먼저 보고, 도망칠 수 있어야 살 수 있다'는 생존원칙이 인간의 모든 미학적 경험에 깔려 있다는 주장이다. 일단 먼저 보고 도망쳐야 한다. 사냥할 때도 마찬가지다. 먼저 볼 수 있어야 한다.

산 위에 올라가거나 한없이 펼쳐진 바닷가에서 행복해지는 이유는 바로 이 '조망-피신'이라는 원시시대의 본능 때문이다. 중년 사내들이 주말마다 골프장에 나가지 못해 안달하는 이유도 바로 이 '조망-피신'의 기억 때문이다. 골프장은 원시시대의 사바나처럼 멀리 조망할 수 있다. 중간중간 나무가 있어 숨을 곳도 있으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최근 나는 여수 섬 바닷가의 무너져가는 미역 창고를 헐값에 샀다. 지금 쓰고 있는 화실은 세 들어 있어 언제고 내줘야 한다. 집주인에게 팔라고 수차례 애원했지만, 거절당했다. 하긴 내가 집주인이라도 절대 안 판다. 여수 인근의 '조망-피신'이 좋은 '명당'은 도무지 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여수 앞바다에는 수백 개의 섬이 있다. 바다가 한없이 펼쳐져 있어 먼저 보고 도망가는 데 아무 문제 없다!

이번에도 박치호 화가 때문이다. '죽이는 빈 창고'가 섬에 있다고 했다. 화가는 모름지기 극도로 외로워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며, 지금의 내 그림은 너무 안이하다고 했다. 허걱! 하루에 배가 두 번씩은 오가는 포구 옆이라 외로움도 견딜 만하다고 했다. 지난주에 불쑥 계약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캄캄하다. 그러나 평생 '쉰내 나는 자연인'만 보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며칠 동안 '바닷가 전원주택'이란 유튜브 채널을 열심히 봤다. 젊은 사람이 바닷가에 집 짓고 좌충우돌 사는 이야기를 어수선하게 보여주는데 구독자만 28만명이란다. 거참. 자기 콘텐츠만 확실하면 '시선의 자유'와 '목구멍이 포도청' 사이의 모순은 얼마든지 해소할 수 있는 세상이다.

아무튼, 축구든 인생이든 운동장은 넓게 써야 한다. 그래야 행복하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