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바다

오만년 정신머리없는 시진핑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

좋은글2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 6~7일 미-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트럼프 대통령이 전했다. <월스트리트 저널>과 한 인터뷰 내용이 18일(현지시각) 추가로 공개된 것이다.
시 주석이 실제 그런 말을 한 건지, 트럼프 대통령이 곡해한 건지는 정확지 않다. 시 주석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고, 단지 트럼프 대통령의 오해와 외교적 관례 무시에 따른 해프닝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사실이라면, 중국 국가원수로서 심히 우려되는 역사인식이다. 그런데 루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20일 정례브리핑에서 이에 대한 질문에 “한국 민중은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만 밝혔다. 그런 말을 했다는 건지 안 했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안 했다면 좀더 진전된 발언으로 오해를 풀어야 한다. “걱정하지 말라”는 한마디로 넘어갈 사안이 아니지 않은가.

미국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중국이 공개적으로 사실관계를 부인하기 힘든 점은 이해한다. 하지만 중국 지도부의 역사인식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하지 않는 한 한-중 관계는 물론 북핵 등 한반도 문제 해결에도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원수끼리의 대화를 일방적으로 공개한 것도 정상이 아니다. 또 한국을 얼마나 무시하면 저런 말을 거침없이 언론에 대고 할까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외교부 대응도 한심하다. 외교부는 19일 공식 성명이나 논평이 아닌 ‘프레스 가이던스’(언론 대응 지침)라는 형태로 “보도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 지난 수천년간 한-중 관계의 역사에 있어 한국이 중국의 일부가 아니었다는 점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며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임. 이러한 이야기는 일고의 가치도 없음”이라고 한 게 대응의 전부다. ‘국내 여론 무마용’으로 마지못해 내놓은 듯하다. ‘사실 여부를 떠나’라고 말하다니, 정상적인 외교부라면 ‘사실 여부’를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자칫 확인 불가능한 논란을 키울 수 있다는 고민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문제가 된 이상 미·중의 분명한 해명을 들어야 하고 국민에게 그 결과를 전해야 한다. 사태가 이리된 바탕엔 오로지 ‘한-미 공조’만 외치며 독자 목소리를 상실한 한국 외교의 전략 부재와 무능이 깔려 있다. 외교부는 역사와 국민 앞에 부끄럽지 아니한가
-한겨레-

나이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끊임없이 비우고 배우며 품위 있게 나이 드는 사람도 있다

좋은글2
윤태웅
ESC 대표·고려대 공대 교수
이번 학기엔 학부에서 ‘신호와 시스템’을 강의합니다. 신호와 시스템의 수학적 정의에서 시작해, 푸리에 급수와 변환을 거쳐, 라플라스 변환의 유도로 끝맺는 과목입니다. 학생들은 신호처리나 통신 같은 분야에 꼭 필요한 수학적 도구들을 익히게 됩니다. 선생으로서 저는 도구 자체보다도 그걸 얻어내는 과정에 관심을 기울이지요.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결과를 부려 쓰는 일은 이제 사람이 인공지능을 앞서기 쉽지 않습니다. 아울러 신호와 시스템의 문제와 별 관련이 없는 분야로 가게 될 학생들을 헤아리면 결과만 강조할 순 없겠지요.

지식 창출의 논리적 과정은 건축에 견줄 수 있습니다. 공리적 토대 위에 명제를 증명하고 그걸 바탕으로 또 다른 명제를 유도해가는 흐름이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와 지붕을 올려 멋진 집을 짓는 일에 비유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공부는 논리적 구성물을 만나는 작업이지요. 저는 학생들에게 말단의 결과만 살피지 말고 논리적 건축 체계에 주목하자고 이야기합니다. 좋은 공부는 자연스레 공부에 관한 공부를 포함합니다. 배워야 할 게 계속 새로이 등장하는 현실을 떠올리면, 결과의 사용법에 집중하는 방식은 소모적이기만 할 뿐입니다.
논리적 체계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자주 부닥치는 장애물은 역설적이게도 기존의 경험입니다. ‘신호와 시스템’을 듣는 학생들은 사실 라플라스 변환이라는 도구가 낯설지 않습니다. 라플라스 변환을 활용해 특정한 종류의 미분방정식을 대수방정식으로 바꿔 풀어본 적이 있지요. 한데 이런 단순 경험이 라플라스 변환에 이르는 이론 체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외려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기둥도 없는데 지붕을 얹으려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익숙함을 앎으로 착각할 때 생길 수 있는 일이지요. 그래서 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전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여러분이 해본 라플라스 변환은 잊으십시오. 여기선 백지 위에 새집을 그릴 것입니다. 진정한 배움(Learning)의 출발점은 의도적 비움(Unlearning)입니다.”
과거의 경험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합니다. 당시엔 타당했다 하더라도, 세상이 바뀌어 맥락이 달라지면 더는 유효하지 않기도 합니다. 특히 요즘처럼 한 치 앞 내다보기도 만만찮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엔 예전의 경험이 새로운 학습을 방해하기 일쑤입니다. 그럴 가능성이 더 커졌다 할밖에요. 대한민국은 위대한 시민혁명을 이뤄냈습니다. ‘이게 나라냐?’를 ‘이게 나라다!’로 바꿔낸 우리 모두가 자랑스럽습니다. 하지만 낡은 시대를 청산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일은 무책임한 무자격자를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과제라 여깁니다.
시민혁명의 완수에 청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길 바랍니다. 철 지난 옛 경험에서 자유롭고 상상력과 학습능력이 풍부한 이들이 새 정부를 세우는 주역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의도적 비움’은 사실 저 자신에게 하는 조언이기도 합니다. 제 또래의 기성세대에게도 전해봅니다. 마치 고장 난 나침판처럼 흔들림 없이 고정된 과거의 시선이 미래세대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말입니다. 학습하지 않는 자의 오래된 경험은 약이 아니라 독일 수 있습니다.
나이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끊임없이 비우고 배우며 품위 있게 나이 드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미래세대와 성찰적인 기성세대가 수평적으로 소통하며 함께 만드는 새로운 세상을 상상해봅니다.
-한겨레-

사회주의 평등사회보다는 불평등하지만, 최약자가 더 잘 살 수 있다면 자본주의를 선택하는 것이 정의라는 결론

좋은글2
우리는 서구 정치사상사의 정점에 있는 정치철학자 존 롤스의 정의론에서 분노 정치를 극복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롤스는, 정의란 사회의 최고 덕목으로서 특별히 분배적 정의가 중요하다고 보고, 분배적 정의의 두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원칙은, 모든 구성원이 최대한의 자유를 평등하게 누려야 한다는 자유의 원칙이다. 둘째 원칙은, 가장 가난한 개인의 지위가 개선돼야 한다는 원칙으로서, 최약자 보호 원칙이라고도 한다. 소외 계층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는 이 둘째 원칙 때문에 롤스의 정의론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환영을 받았다.

close
그런데 둘째 원칙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롤스가 단지 약자를 배려하는 이상주의자일 뿐 아니라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둔 현실주의자임을 알 수 있다. 롤스는 먼저 개인은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얻은 소득이라도 자신의 소유를 주장할 도덕적 근거가 없으므로 소득은 완전히 평등하게 재분배돼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롤스는 곧 다음과 같은 단서를 붙인다. 즉, 평등 분배가 바람직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두 소득이 줄고 가난한 사람도 고통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재능과 노력이 있는 사람에게 더 큰 소득을 허용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도 더 잘 살 수 있게 된다면 그러한 불평등은 용인돼야 한다는 것이 둘째 원칙의 의미다. 롤스는 경쟁과 자기 이익 추구를 허용하는 자본주의가 다 같이 못사는 사회주의 평등사회보다는 불평등하지만, 최약자가 더 잘 살 수 있다면 자본주의를 선택하는 것이 정의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것이 복지국가 시장경제의 철학적 기초다.

이러한 정치철학은 애덤 스미스의 통찰에서 시작된다. 그의 유명한 ‘국부론’의 한 구절을 보자. ‘우리가 저녁 식탁을 대할 수 있는 것은 상인들의 호의와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이기심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이익을 말해야 한다. 걸인만이 동료 시민들의 호의에 의존하려 할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경멸해 마지않았던 ‘상인의 이기심’이 현대 시장경제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스미스의 현실 인식이 우리나라 좌파 지식인과 정치인에게는 결여돼 있다. 그들은 이기심이 어떻게 정의사회를 구현하는 원리가 될 수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기업은 모두 약자인 중소기업을 약탈하고, 재벌 총수는 자기 이익을 위해 불법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며, 보수 정치인은 권력만을 탐하는 집단이라고 간주한다. 친일파로부터 시작된 우리 사회의 이러한 기득권 세력을 규제하고 교체해야 정의가 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분노 정치의 뿌리다.

우리 경제가 노무현정부 이래 계속 어려움에 처해 있는 근본적인 원인은 반기업 정서와 기업에 대한 과도한 규제에 있다.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바탕으로 하면서 복지와 분배적 정의를 구현하고 경제의 선진화를 이루는 것이 가능함을 롤스의 정의론은 보여준다. 신(新)성장동력을 찾아내고 일자리를 만들고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하는 것은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진보와 보수 모두 분노의 정치를 거두고, 개인의 사익(私益) 추구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 정의를 세우는 합리적인 정치철학을 받아들일 때 우리 사회는 새로운 도약이 가능할 것이다.
-문화일보-

삶은 유한하고 죽음은 영원하다

좋은글2
 삶은 유한하고 죽음은 영원하다. 이 만고불변의 진리를 누구라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삶이 끝나는 자리에서 죽음이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서양에서의 근대적 사유 체계인 이원론적 세계관은 삶과 죽음을 분리해 사고하지만 유서 깊은 동양적 사유 체계, 즉 일원론적 세계관에 따르면 삶과 죽음은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는 대립 쌍이 아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활과 리라’의 저자, 남미의 작고 시인 옥타비오 파스에 따르면 삶과 죽음은 유기체의 한 몸 안에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고 있다. 삶이 끝나면 죽음도 끝난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감과 동시에 죽어 간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 우리는 날마다 살아가지만 날마다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첨단과학이 발달해도 이것만은 부정할 수 없고 물리, 수학에 능한 이라 할지라도 삶에서 죽음을 따로 분리해 내거나 솎아 낼 수는 없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관념론자들의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나날의 일상 속에서 죽음을 살면서(경험하면서) 시나브로 죽음(자연)에 다가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삶의 진실을 도덕학으로 규명하는 일 또한 명쾌하지 않을뿐더러 옳은 일도 아니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윤리와 도덕은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윤리는 공공적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서 공공적 실천을 통해서 구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반면에 도덕은 개인이 속한 사회의 상규나 관습”(김명인)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윤리와 도덕은 서로 대립하고 갈등할 수 있다. 그가 말의 온전한 의미에서 삶의 진실을 추구하는 이라면 현실 너머를 꿈꾸는 자로서 도덕에 얽매이거나 안주하는 것이 아닌 윤리적 태도와 실천으로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그가 속한 사회의 전통과 관습이 낡고 고루하다면 이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삶의 진실을 구현하는 데 종교학도 적절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종교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의 방편으로 추구될 수는 있다. 하지만 종교는 인간의 제 갈등을 신의 논리로 수렴해 각 개인이 처한 실존적 정황과 세목을 추상화함으로써 삶의 진실을 굴절 또는 왜곡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서울역은 다종다양한 한국적 삶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시적 공간이다. 모진 겨울을 넘기고 나온, 허리가 땅에 더 가까워진 할아버지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몸에 좋은 약초를 팔고 있다. 죽음이란 땅의 중력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는 언젠가 삶과 함께해 온 죽음을 보내고 영원한 안식처인 자연으로 귀환할 것이다. 하지만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주인공이 보이고 있는 죽음에 대한 예민한 자의식과는 달리 시 속 노인은 죽음에 대한 의식이 없다. 시 속의 노인은 삶과 죽음을 분별하지 않는 일원론적 세계를 보여 준다.

우리는 위 단시를 통해 과학과 도덕과 종교가 규명하지 못한 삶의 구체적 진실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다
-서울신문-

중국의 갑질 '중국질'

좋은글2
현재 우리는 북한의 미사일 공격 방어용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의 국내 배치를 제재하기 위한 중국의 온갖 치졸한 경제 보복 조치를 당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부인하든 말든 국가 체제상 정부의 공식, 비공식 지시와 가이드라인 없이 이러한 일들이 벌어질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안다.
 
물론 이러한 조치는 2001년 가입 후 중국 경제의 대도약의 발판이 된 세계무역기구(WTO) 규범의 위반이다. 게다가 시진핑 국가주석이 연초 다보스포럼에서 보호무역주의를 거부하고 세계화의 지속을 위해 중국이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하겠다고 선언한 지 얼마 안 돼 일어난 일이라 더욱 놀랍다. 필자는 지난번 이 칼럼(2월 8일자)에서 지적한 내용대로 시진핑의 다보스 수사가 현실로 이어지리라고 보지 않았다. 중국 지도층을 근본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어느 외국 전문가는 “시진핑의 보기 좋은 다보스 사진이 중국이 지향하는 ‘보기 추한 방향’을 숨기지는 못할 것”이라고까지 혹평한 바 있다.
 
과연 이 시점에서 중국이 지향하는 국가 목표는 무엇이며 왜 이런 일을 하게 되었을까. 미국 워싱턴의 국제경제 분야의 정책 입안과 여론 지도층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어느 시사잡지는 최근 중국의 세계를 향한 진짜 속셈이 무엇인지에 대한 최고 전문가 30여 명의 의견을 개진한 바 있다. 예상한 대로 아직 중국이 적극적으로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할 의사도 능력도 없다는 것이 그들의 중론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시아 지역에서의 중국의 전략적 의도다. 그것은 시진핑이 내건 중국몽(中國夢), 즉 과거 중국(Middle Kingdom)의 영광을 되찾고, 아시아에서 중국 중심의 새로운 지역 질서를 이룩하겠다는 목표라고 봐야 한다. 중국과 주변국 간에 과거와 같은 조공 관계의 지역 질서는 아니더라도 중국 중심의 지정학적 관계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사드 배치와 관련해 국제사회에 비이성적으로 비춰지며 중국 지도자의 모순된 행태마저 보여주는 일을 서슴지 않는 것은 지역 중심국의 의사에 반하는 주변국을 길들여 새로운 지역 질서를 만들어 내겠다는 중국의 주변국에 대한 갑(甲)질인 ‘중국질’에서 나온 것으로 봐야 한다. 이미 중국 경제는 세계 속의 비중이 15%에 이른다. 머지않아 현재 25% 수준에 있는 미국 경제를 앞서게 될 것(구매력 평가 기준에선 이미 미국을 앞서 있음)이며, 군사력 또한 크게 성장할 것이다. 문제는 중국이 경제적·군사적으로 점점 더 그 힘이 커짐에 따라, 이 지역 내에서의 중국질은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데 있다.
 
이러한 중국 중심의 지역 질서 유지를 위해 중국은 경제적 힘을 지렛대로 활용하게 될 것이라는 점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예상됐던 일이다. 현재 추진 중에 있는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창설도 중국이 ‘현금과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통한 네트워크 형성’을 통해 주변국의 중국 의존도를 높이려는 측면임을 강조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지금까지 한국 경제는 고도 성장하는 중국 경제의 ‘이웃효과’를 최대한 누려왔다. 그 결과 현재 우리 수출의 4분의 1을 중국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중국은 우리 기업 투자가 제일 많은 나라가 됐다.
 
앞으로 중국질이 점점 심해질 것에 대비해 우리는 좀 더 긴 안목에서 전략적 접근으로 대응해야 한다. 지난 일이지만 사드 문제만 해도 이러한 차원의 안목이 없었기 때문에 중국과 사전에 충분히 소통(우리 국민과는 말할 것도 없고)하고 이해를 구하는 절차가 없었다. 그러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드 배치와 관련된 중국질은 우선 국제사회에 중국의 치사한 모습을 알리고, WTO에 제소하는 등 당당하게 맞서야 한다. 주요 2개국(G2)으로서 글로벌 리더십을 넘보는 중국은 국제사회에서의 자국 이미지 실추를 물론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번 사드 사태를 계기로 우리는 국가발전의 전략적 차원에서 무역과 투자의 대중국 의존도를 낮춰나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특히 이 지역의 지정학적 측면에서 중요한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인도를 포함하는 모든 나라들과의 무역, 투자뿐 아니라 광범위한 경제협력을 늘릴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선택과 집중으로 중국보다 항상 앞서가는 분야를 창출하는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한다.
-중앙일보-

북한이 어제 서해 동창리에서 동해 쪽으로 중거리미사일로 추정되는 탄도미사일 4발을 동시에 발사

좋은글2
북한이 어제 서해 동창리에서 동해 쪽으로 중거리미사일로 추정되는 탄도미사일 4발을 동시에 발사했다. 지난달 ‘북극성 2형’ 중장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지 22일 만이다. 이는 한반도 및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전에 대한 위협이자 유엔 안보리 결의의 중대 위반이다. 지역 평화를 깨뜨리고 국제규범을 거듭 파괴하는 행위를 용납할 수 없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대북정책을 저울질하고 있는 민감한 시기에 보란 듯이 이뤄졌다.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은 대북정책을 재검토하면서 대북 선제타격, 대중국 세컨더리 보이콧과 함께 한국에 전술핵무기를 재배치하는 방안을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나하나가 한반도의 운명과 직결되는 사안들이다. 특히 전술핵 재배치는 한반도에서 핵무기 경쟁을 하자는 것으로 결코 북핵 문제 해결의 대안이 될 수 없다.

더구나 트럼프 대통령은 예측불가의 인물이다. 후보 때부터 대북 강경 발언을 쏟아내더니 취임 후에는 갈수록 발언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북한을 매우 강하게 다스리겠다” “김정은이 한 일에 대해 매우 화가 난다”는 그의 발언에서는 북핵 문제의 합리적 해결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자칫 북한의 도발과 미국의 대북 강경책이 부딪칠 가능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북·미가 번갈아가며 모험적 대응을 하면 서로에게 강경책의 명분을 제공하게 될 것이고 이는 다시 한반도의 군사적 불안을 고조시키는 악순환을 초래할지 모른다.

이를 모를 리 없는 북한이 잇따라 도발하고 있는 것은 한반도 정세를 흔들어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해보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듯하다. 하지만 북한이 얻을 것은 없다. 당장 한·미 양국은 북한 도발을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의 명분으로 삼으려 할 것이다. 사드에 반대하는 중국의 입장도 곤혹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중국의 대북 지원 명분은 약화되고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명분은 강화될 것이다.
-경향신문-

“자기 자신을 시험에 부치지 않는 삶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없다.”

좋은글2
“자기 자신을 시험에 부치지 않는 삶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없다.” 소크라테스는 앎과 삶을 일치시키고자 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스스로를 시험에 처하게 하는 것이었을 테다. 이는 그 유명한 델포이 신전의 전언, “네 자신을 알라”의 구체적 지침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를 시험에 처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루소의 말처럼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그렇게 따르기 쉬운 격언이 아니다. 루소는 <고백>을 쓰면서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여러 번 토로한다. 사실 안다고 믿는 자기 자신은 연출되거나 위장된 자기 자신일 확률이 높다. 우리는 우리이길 원하는 나를 나라고 믿는다. 매일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 속에서는 자신을 돌아보기 힘들다. 그러니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어쩌면 스스로 시험을 자초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무릇 사람이란 일상의 반복을 행복이라 여기며 지내지 않던가? 과연 누가 굳이 닥치지 않은 위험을 연상하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불편을 상상해서 자신을 고민하려 할까?

[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나 자신을 아는 것
영화 속의 많은 주인공들이 삶의 위기에서 출발하는 이유도 아마 여기 있을 것이다. <비긴 어게인>의 남자 주인공 댄(마크 러팔로)도, <러덜리스>의 주인공 샘(빌리 크루덥)도 그렇다. 그들은 삶이라는 항해에서 처참한 난파선이 된 채 관객들과 만난다. 댄은 음악계에서 거의 추방된 상태이고, 샘은 예상치 못했던 아들의 사고로 삶의 중심을 잃어 버렸다. 최근에 개봉한 한국 영화 <싱글라이더>의 주인공 강재훈(이병헌)도 삶의 벼랑 끝에 서 있다. 한 아이의 아버지이자, 한 여자의 남편 그리고 꽤나 성공적인 직장인으로 살았던 그는 그동안 쌓아왔던 삶 전부가 거절되는 시점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

세 주인공의 공통점 중 하나는 바로 그들이 성공한 사회인이기 이전에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느새인가 아버지가 가족 내 구성원이 아니라 일종의 직업이 된 것은 아닌가 싶다. 결혼도 선택, 출산도 선택이 된 게 특별한 일이라기보다 보편적 상황이 되었음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어느새, 아버지가 어느 정도 나이가 찬 남성에 대한 일반적 호칭이 아니라 특수한 처지를 가리킬 수 있는 언어가 되었다. 어쩌면, 한 이십년 후쯤이면 길에서 만난 중후한 장년을 무턱대고, “아버님”이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싱글라이더>는 아버지라는 직업을 가졌으나 미처 그것을 감지하지 못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증권 회사 지점장으로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중요한 것은 돈과 숫자였다. 얼마나 많은 투자자를 모으고, 얼마나 큰 이익을 얻는지, 숫자로 확인되지 않는 것들은 그에게 무의미하거나 쓸모없는 것에 불과했다. 당연히 가족은 숫자로 환산될 수 없다.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내가 얼마나 필요한지의 문제는 결코 증명 가능한 숫자나 교환 가능한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다.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가치이기에 그에게 가족은 점점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고 따라서 그다지 생각나지도, 그렇다고 마음이 쓰이지도 않는 대상이 되고 만다. 그는 아버지이긴 했으나 아버지는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삶의 중대한 위기에 봉착하고 나서야 그는 겨우 가족을 둘러본다. 아니 엄밀히 말해 그제서야 겨우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자신의 가치와 의미, 위치를 가족 가운데서 찾아보게 된다. 자아는 발견되어야 소유될 수 있다. 그리고 참 역설적이게도 자아를 갖게 되면 그 순간부터 자아는 요령부득의 못 믿을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의 안락을 위해 최대한 의심의 순간을 미룬다. 그러니 우리는 대개 너무 늦게 자신을 돌아본다.
나이가 마흔이 넘도록 이십년이 넘게 매달 월경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달 정확한 날짜를 몰라 허둥지둥하기 일쑤다. 예고된 변화이고 반복된 신체적 반응이지만 아직 그조차도 미지수에 가깝다. 이러다 덜컥 폐경이 온다고 해도 아마도 그때도 나 자신에게 속았다는 기분이 들 것이다. 신체도 그런데 영혼과 정신이야 어떨까? 반복도, 패턴도 그렇다고 예고나 지표도 없는 영혼으로서의 나란 얼마나 미지수이던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알 수 없는 게 더 많고, 가장 알 수 없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과연, 나란 사람은 어떤 존재일까?

나 자신을 알고 싶지만 그것이야말로 늘 만시지탄일 듯싶다. 사람은 살면서 자기 자신을 알아야만 하지만 결국 너무 늦게 자신을 알려 하거나 알고 나면 대개 너무 늦다. 아니 너무 늦은 순간에도 여전히 스스로를 모르는 건 아닐까 싶다. 문학과 영화, 철학이 삶에 어떤 힘을 준다면 그건 다름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위험에 처하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편안한 이 삶 속에서 닥쳐서야 느끼게 되는 그런 수동적 위험이 아니라 상상으로 미리 닿아 볼 수 있는 개연적인 위험. 닥치지 않은 위험을 상상해 그 가운데서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만이 지닌 능력이 아닐까? 너무 편안하다면 오히려 불안해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건 우리가 무엇인가 괄호에 넣은 채 잊고 산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경향신문-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odox)’

좋은글2
누구나 읽은 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두고두고 기억에 남아 다시 찾게 되는 책이 있을 것이다. 필자에게도 직장에서 또는 사회에서 변화하는 상황을 바라보며 자주 생각나는 책이 하나 있다. 바로 세계적인 경영컨설턴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짐 콜린스(Jim Collins)의 저서 ‘굿 투 그레이트(Good To Great·한국어 제목 :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2001)’이다.

이 책은 1965년에서 1995년 사이 포춘(Fortune) 500개 기업 중 명멸해가는 다른 회사들과 달리 장기 지속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소수의 위대한 기업들이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 어떤 결정 요소나 비밀들이 필요했던 것인지에 대해서 여러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과거의 리더쉽 이론을 넘는 ‘단계 5’의 리더십을 제시하면서 많은 영감과 자극을 주는 분석들이 있었는데 특히 그 중에서 최근 들어 자주 되새기게 되는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odox)’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는 베트남 전쟁 당시 포로수용소에 갇혔던 미국 포로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스톡데일 장군(Jim Stockdale)의 이름과 사례에서 유래하였다.

스톡데일 장군과 함께 수용되었던 포로들 중 미래를 낙관하는 데 집중했던 사람들은 그 기대가 좌절되었을 때 이에 대한 대비가 부족하여 무력하게 죽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이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스톡데일 장군의 지도대로 마음을 다잡았던 사람들은 결국 살아서 수용소를 나올 수 있었다. 즉, 스톡데일 패러독스에 따르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결국에는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닌 동시에, ‘가장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하는 용기’를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끝까지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 부 직원들을 만나서 업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상황들이 그 어느 때보다 쉽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나는 직원들에게 무조건 “열심히 하라”라고 말하기보다는, “어렵더라도 문제의 본질에 파고들기 위해 노력하고, 오래 걸려도 반드시 극복하여 오히려 위대한 발전의 계기가 되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자”고 당부한다. 때로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너무나 복잡하고 어려워 보여 뚜껑을 열고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을 주저하게 되지만, 그럴 경우 문제의 본질과 디테일 안에 숨어 있는 해결의 실마리도 함께 놓치게 된다는 것을 30여년 간의 공직 경험을 거쳐 절감하여 왔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상황과 위기에 대한 집단적 인식 공유와 해결 방향 마련, 그리고 강한 극복 의지와 지속적인 행동이야말로 우리를 궁극적으로 위대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오늘날 스톡데일 패러독스가 주는 메시지를 다시 한 번 곱씹어본다. 정해진 석방 날짜도, 살려 보낼 것이라는 보장도 없는 냉혹한 포로 생활 속에서 “나는 여기서 풀려날 거라는 희망을 추호도 버린 적이 없으며 이 경험을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내 생애의 전기로 만들겠다”라고 다짐 했던 스톡데일 장군의 말처럼 올해를 우리 정부와 사회, 나아가 우리나라의 새로운 전기로 삼고, ‘Good to Great’를 꿈꾸며 기적과 같은 반전을 만들어 나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김영석 해양수산부 장관
-세계일보-

교황청과 백악관 혹은 미국 정보부처는 음습한 ‘정치 공작’의 의혹에 휩싸이곤 했다

좋은글2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 작업에 대한 가톨릭 보수파의 반발이 거세졌다. 갑자기 교황은 외롭게 고립됐다는 보도가 나온다. 그는 전임 버락 오바마의 백악관과는 ‘동맹’이라 할 만큼 손발이 맞았다. 이달 초 이탈리아 로마 시내에 교황을 비방하는 벽보가 나붙으며 내연됐던 가톨릭 보혁 갈등이 겉으로 불거진 형국이지만, 그 배후에는 진보적 성향인 교황과 대립해온 미국 출신 ‘가톨릭 보수파의 거두’ 레이먼드 버크 추기경이 있다고 서구언론은 본다. 버크 추기경은 트럼프의 ‘문고리 권력’으로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는 스티브 배넌 백악관 수석 전략가 겸 선임고문과 가까운 사이다. 배넌은 ‘과격 전통주의’(Rad-Trads)로 분류되는 가톨릭식 근본주의자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두 사람은 세계관이 일치하는 ‘가슴의 만남(meeting of hearts)’을 가졌다고 한다.

왜 교황과 각을 세울까 싶지만, 이주민·난민 포용, 빈부 격차 해소, 친환경 정책 등을 주장해온 교황의 발언은 세계 곳곳의 가톨릭 신도뿐 아니라 지구촌 여론에 영향을 미쳐왔다. 며칠 사이만 해도 교황과 교황청은 이슬람권 이민자 입국 금지, 원주민과 갈등을 빚는 다코타 송유관 건설 허용 등 트럼프의 출범 직후 정책들에 쓴소리를 쏟았다. 사실 역사적으로 교황청과 백악관 혹은 미국 정보부처는 음습한 ‘정치 공작’의 의혹에 휩싸이곤 했다.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로 유명한 칼 번스타인은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0년대 동구권을 몰락시키기 위해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및 중앙정보국(CIA)과 긴밀히 협력했던 정황을 폭로했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눈엣가시 같은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모종의 음해 공작을 펼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나온다. 트럼프 체제는 가톨릭뿐 아니라 세계 종교지형 자체를 긴장시키고 있다. 이슬람권과 대립은 차치하고라도, 당장 그의 공약사항 중 하나인 ‘존슨 수정헌법’의 폐기가 강행되면 미국뿐 아니고 다른 나라의 정치와 종교에도 영향을 미친다. 트럼프가 지난 2일 재임 첫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다시 폐기를 확인한 이 법은 재산세·취득세·등록세 등 막대한 세금 면제 혜택을 받는 교회 혹은 비영리단체가 정치에 직접 개입하지 못하게 하는 법안이다. 목사가 교회에서 설교 중에 특정 정당 혹은 후보를 지지하면 면세권을 박탈당할 수 있다. 트럼프는 “미국은 목사들만 말할 자유가 없다”며 존슨 수정헌법 폐기를 종교와 언론의 자유로 포장했다.

시카고 트리뷴은 존슨 수정헌법이 폐기된다면 미국인들이 선거 운동을 위해 교회에 무제한으로 기부할 수 있게 되며, 교회가 정당을 뛰어넘는 정치단체로 변모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근본주의가 대세인 미국 개신교회가 입맛에 맞는 후보를 지지해 정치의 다양성을 해치고, 교회가 정치인들의 로비창구가 되지 말란 법이 없는 것이다. 미국 내에서 교세가 적은 다른 종교는 위축되지 않을 수 없고, 종교갈등은 예상치 못한 양상으로 번질 수 있다. 근본주의 개신교의 전폭적인 지지로 당선된 트럼프의 ‘한다면 한다’는 행보에 촉각을 세우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문화일보- 트럼프와 종교 엄주엽


삼성은 권력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돈을 건넸다고 하지만 특검은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등 경영권 승계 전반에 걸쳐 이 부회장이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좋은글2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수사에 재계는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에 큰 부담”(경총)이라고 했다. “국내 최고 기업의 리더가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에 상실감을 느낀다” “맥빠지는 결과”라는 말도 나온다. 재계의 이런 반응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정경유착 근절과 재계의 반성을 요구하고 있는 시민 다수의 생각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 뇌물·횡령 등 이 부회장의 혐의가 말해주듯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은 삼성과 권력 간 정경유착에 기인한 것이다. 삼성은 권력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돈을 건넸다고 하지만 특검은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등 경영권 승계 전반에 걸쳐 이 부회장이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은 3대째 경영세습을 이어오는 동안 여러 차례 불법 의혹이 제기됐지만 한번도 총수가 구속된 적이 없었다. 권력이 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이유로 문제를 덮어주고, 기득권 집단이 이를 비호해 온 결과였다. 일반 시민들에게는 추상같던 법이 삼성에만은 예외였던 셈이다.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수사는 이 같은 비정상이 묵인해줄 수 있는 한계점에 다다랐고, 따라서 삼성도 법의 지배하에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삼성은 이번 사태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일각에서 경영위기론이 나오는 모양이지만 이는 본질에서 벗어난 주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구속으로 일시적 혼란은 있겠지만 경영 마비 운운하는 것은 삼성이 글로벌 기업임을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다. 그동안 총수 구속으로 한국 경제가 위기를 맞거나 총수 석방으로 경제가 회생한 전례도 없다. 총수 유고로 삼성의 쇄신작업은 물론 인사·채용도 멈출 것이라는 얘기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 부회장이 없으면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는 주장은 최순실 일당에 대한 지원이 이 부회장의 승인 아래 이뤄졌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재계도 경거망동하지 말고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한다. 이미 특검 조사를 통해 몇몇 재벌들은 출연 등의 대가로 사면 또는 사업권을 획득했다는 물증과 진술들이 나온 터다. 이 부회장 구속수사는 총수들에 대한 과잉보호와 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를 뜯어고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재벌을 둘러싼 기득권 집단의 공고한 카르텔도 무너져야 한다. 이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국 경제도 도약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경향신문-